영-시

골목길을 걷는 디자이너의 시선 ⎸ 《낯선 골목길을 걷는 디자이너》

2024년 5월 3일부터 5월 26일까지 대구 북성로의 복합문화공간 ‘무영당 Department’에서 정재완 디자이너의 개인전 《낯선 골목길을 걷는 디자이너》가 진행되었다.

『낯선 골목길을 걷는 디자이너』는 북 디자이너이자 영남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인 정재완이 2020년 3월부터 2023년 6월까지 지난 3년간 문화 예술 잡지 《대구문화》 ‘현상의 시선’과 일간지 《영남일보》 ‘정재완의 디자인 생각’에 연재한 글들을 엮어 만든 책이다. 발간된 책과 동일한 이름으로 대구 북성로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무영당Department’ 3층에서 전시가 열렸다.

낯선 골목길을 걷는 디자이너, 정재완 - 도서

『낯선 골목길을 걷는 디자이너』는 정재완 작가가 대구 곳곳의 골목을 걸으며 마주친 디자인 역사와 유산 그리고 현재를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작성한 글을 보아둔 에세이집이다.

책 속 각각의 이야기에는 정재완 작가가 터를 옮기며 가까워진 대구의 디자인 유산과 현재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의 삶 속에서 맞닿아 있는 디자인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작가가 거리를 거닐며 마주친 골목 속의 디자인 이야기와 대구에 터를 옮기며 일어난 에피소드, 도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마주친 거리 글자의 매력, 사투리, 디자인, 폰트, 책을 디자인적 사고로 풀어내었다.

”책은 사람과 닮았다.··· 닫혀 있으면 그 속을 알기 어렵지만, 책이 열리는 순간 쪽마다 만나는 이야기와 장면들은 어느새 서로의 거리를 좁혀준다”. 이 표현처럼 책을 열고 작가의 생각을 따라 걷다 보면 디자인과 책, 그의 삶과 고향, 그리고 새로운 터전이자 바탕이 되어준 대구와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무심하게 지나갈 법한 골목의 작은 요소들을 풀어쓴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어느새 그의 깊은 디자인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작가는 책 뒤표지의 글에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웅얼거림”이라고 자신의 글에 대해 표현해 두었지만 작가가 가진 디자인에 대한 넓은 견해와 디자이너들을 대하는 법, 또 애정하는 도시인 대구를 디자인적 사고로 바라보는 법을 느낄 수 있는 무게감 있는 글로 구성된 단단한 생각이 담긴 책이다.

낯선 골목길을 걷는 디자이너, 정재완 - 전시

전시장 중심에는 큰 나무판자 테이블이 있다(책, 잡지, 포스터, 소품 등이 배치되어 있다). 테이블 위에는 책 속에 글로만 등장하는 어떤 사람, 사건, 디자인 결과물들을 보여주기 위해 연출한 사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각 사물에는 번호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 번호들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이를 들여다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테이블에 올려진 종이에도 각 번호가 있고 책에서 발췌한 글이 쓰여 있다. 발췌된 글은 각 사물이 어떤 맥락에서 이야기되고 있는지 설명해 준다(동아쇼핑 광고, 『아파트 글자』, 『자갈마당』, 『북성로 글자 풍경』, 애자(뚱딴지), 사월의 눈 설계도면, 『애린왕자』 등). 전시 리플렛에는 전시장에 놓인 사물은 『낯선 골목길을 걷는 디자이너』 글에 등장하는 ‘친밀한’ 것들이라고 작가가 소개해 두었다.

테이블 우측에는 대구의 구도심 한복판에 몰려있는 작가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공간들을 표현한 지도와 공간들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도장이 여러 개 배치 되어있다. 이 지도에는 책 속에 등장하는 팀과 사람들이 어디에서 활동하는지를 알려주고 작가가 직접 디자인한 레터링 문구를 찍어낸 도장이 각 활동지 위치에 맞게 지도 위에 우뚝 서 있다. 테이블 좌측에는 작가가 생각하는 대구의 이미지인 특산물 ‘사과’와 수성못의 ‘오리배’를 프린팅한 천이 걸려있다. 작가는 일제 치하의 역사적 상징이자 대구의 양품이 된 사과의 의미를 생각하며 사과 이미지를 프린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수성못의 오리배는 류지영 감독의 영화 〈수성못〉에 등장한 오리배로 지방대학생이 지방에 갇혀 자유롭지 못한 답답한 심경을 대변하는 영화의 요소에서 감명받아 대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 수성못 오리배를 프린팅해 두었다.

벽 쪽에 배치된 테이블에는 대구에 관한 주제로 디자인한 책들이 놓여 있다. 마지막 테이블에는 전시 포스터가 놓여있고 방명록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전시장은 책 속에 등장하는 글들을 뒷받침하는, 일종의 증거 자료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전시장 중간 파티션을 넘으면 정재완 디자이너의 또 다른 작품 ‘한글 실험 11172+’를 볼 수 있다. 이 작업은 음절 표기에 대한 실험을 한 작품이다. 1음절의 영어 단어를 한글로 옮겨적을 때는 2~5음절 이상이 된다는 상황에서 시작하여 만들어진 작업이다. 영어 ‘Strike’는 1음절이지만, 한글로 옮기면 ‘스-트-라-이-크’로 5음절이 된다. 작가는 5음절의 한글 단어를 하나의 글자로 모아서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새로운 표현 방식을 제안했다. 15세기 『훈민정음』(1446)과 『동국정운』(1448)에서 세종이 선보인 여섯 글자를 골라 한자와 합쳐 연출한 것이 작가의 ‘한글 실험’의 출발점이라는 것 또한 흥미롭다. 『동국정운』은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간행된 책이다. 그가 생각하는 한글의 장점을 이용한 확장성에 대한 생각과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걷기라는 행위로 연결된 책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일터이자 터전인 대구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정재완 디자이너가 느껴진다. 대학교수이자 북 디자이너로서 도시를 바라보고 디자인을 고민하는 정재완 디자이너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책과 전시가 일상 속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눈길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낯선 골목길을 걷는 디자이너》

장소: 무영당 Department 3층
기간: 2024. 05. 03. - 26.


➀ 『동국정운(東國正韻)』은 1448년(세종 30)에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 등이 간행한 운서(韻書)이다. 책 제목이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인 것처럼, 조선의 표준 한자음을 제정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사진 출처: www.instagram.com/jj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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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우재영 2024.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