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밝히는 포스터들 | ⟪암흑의 날로부터⟫
‘암흑의 날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는 다시 암흑을 마주하고 있다는 절망과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다. 차츰 전진하는 걸로 여겼던 민주주의가 혹시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뒷걸음질 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두운 미로를 헤매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겐 또렷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가족이, 이웃이, 친구가 ‘암흑의 날’로부터 50년간 당당히 걸어온 민주주의의 궤적을 50명의 시각예술가들이 제각각의 개성적 시각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어두운 역사의 조각들과 각자의 방식으로 암흑의 날을 헤쳐온 시민 각자의 빛나는 기억 들을 광장 위에 올려둡니다. 독재자의 동상과 그 후예들의 뒤틀린 반(反) 민주주의적 욕망을 넘어 다시 광장의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일상의 길잡이가 되기 위하여.
전시 서문 중 발췌 — 2025년 3월 기획자 한상훈
2025년 4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 동안 동대구역 광장 박정희 동상 뒤편에서 두 개의 전시가 열렸다. 50여 명의 시각 작업자들이 50여 개의 포스터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걸어온 세월을 반추하는 포스터 전시 《암흑의 날로부터》➀와 깃발, 만장, 손피켓, 걸개그림, 단체 티셔츠, 촛불, 응원봉 등 간접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광장으로 나서 직접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간 시민들의 물건들과 이야기를 전시한 《빛나는 민주주의의 사물들》➁이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이하 인혁당사건) 50주기를 맞아 열린 두 전시의 정식 명칭은 ‘인혁당사건 50주기 광장展’이다. ‘4.9인혁재단’과 ‘10월 문학회’ 등 40여 개 단체들이 조직한 ‘4.9통일열사50주기 행사위원회’가 제안하고 대구의 문화 기획자 한상훈이 기획을 했다. 이 글에서는 두 전시 중 그래픽 포스터 전시인 《암흑의 날로부터》를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포스터 디자인: 구김종이
암흑의 날로부터
《암흑의 날로부터》는 시각 작업자 51명을 모아 그들의 포스터로 1975년부터 2025년까지, 민주주의가 걸어온 반세기를 반추하는 전시이다. 전시 현장에 설치한 비계(飛階, scaffolding) 구조물➂ 위에 판자를 붙이고, 그 위에 시트지로 출력한 포스터들을 부착했다. 다년간 야외 행사를 진행한 경험이 있는 지역 미술가들과 한상훈 기획자의 아이디어였다.
전시 준비는 작업자 섭외—연도 배정—포스터 제출의 순서로 진행했다. 섭외한 시각 작업자에게 희망하는 연도를 묻고, 연도가 정해지면 사회, 정치, 문화, 예술 가릴 것 없이 그해에 중요한 이슈들을 단어로 나열한 문서를 전달했다. 문서를 읽은 작업자는 그중 선호하는 단어를 선택해 시각화하는 식이었다.
포스터는 700mm x 700mm 크기 정사각형 포스터 48장과 대형 포스터 3장으로 구성했다. 동대구역 광장의 박정희 동상을 구조물로 가로막아 전시를 하는 것이 이 전시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으므로, 비계 구조물의 크기를 먼저 계산하고 난 뒤에 각 포스터의 위치와 크기를 구상했다. 출발점과 도착점인 1975년과 2025년은 대형 사이즈 포스터로 만들었다. 각각 민중미술가인 이윤엽 판화가와 대구의 그래피티 작가로 잘 알려진 Pallo가 맡았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희생자 여덟 명이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2007년도 1975년과 2025년과 마찬가지로 크게 강조했다. 대구에서 오랫동안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유연한’을 운영했던 현준혁 디자이너가 2007년 포스터를 맡아 디자인했다.


전시 그래픽
《암흑의 날로부터》와 《빛나는 민주주의의 사물들》, 두 전시의 전시 그래픽은 ‘빛’을 모티브로 제작했다. 《암흑의 날로부터》는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걸어 나오는 민중의 자아를 형상화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사형 선고를 집행한 1975년 4월 9일을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이라 규정했다. 1975년 암흑의 날로부터 2025년까지 반세기를 반추하는 포스터 전시의 그래픽 모티브를 어둠에서 빛으로 점차 전개되는 ‘그라데이션(Gradation)’이 아니라 ‘핀 조명(Pin Spot)’로 설정한 이유는 2025년 3월 전시를 준비하는 기간의 ‘현재’가 밝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명과 암이 공존한다. 시간 선을 따라서 점차 나아지기만 하지는 않는다. 12.3 비상계엄 사태와 그 후에 일어난 전국적 탄핵 집회들을 보며, 여전히 어두운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목격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빛을 향해 발을 내딛는 민중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빛나는 민주주의의 사물들》은 이번 윤석열 탄핵 시위에서 화제가 됐던 아이돌 응원봉을 소재로 사용했다. 빛을 내는 오브제들이 민주주의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시각화했다. 응원봉의 등장은 20대, 30대 젊은 여성층이 이번 탄핵 시위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암흑의 날로부터》의 전시 그래픽을 완성한 상태에서 예산이 부족한 《빛나는 민주주의의 사물들》의 전시 그래픽 의뢰를 추가로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두 전시의 시각적 연관성을 더 쉽게 도출할 수 있었다.
《암흑의 날로부터》와 《빛나는 민주주의의 사물들》 전시 그래픽에 제목 글자는 좌우 폭이 좁은 장체(長體, Condensed) 사용했다. 《암흑의 날로부터》 전시의 제목을 ‘1975-2025 암흑의 날로부터’라는 이름으로 사용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기 때문에, 긴 제목을 함축해서 보여줄 수 있는 제목 글자를 구상했다. 나중에 추가 의뢰를 받은 《빛나는 민주주의의 사물들》 전시 그래픽 역시 글자 수가 많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래픽 디자인: 구김종이
어둠을 밝히는 포스터들
‘대구의 민주주의가 진짜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그 말마따나 특정 정당의 표밭이라 말하는 이곳 대구의 민주주의는 다른 지역과는 무게감이 다르다.
《암흑의 날로부터》와 《빛나는 민주주의의 사물들》은 지난 세월 동안 대구의 민주화를 부르짖은 민중예술가들의 손에 의해 기획됐고, 대구에서 정치적 논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동대구역 광장 박정희 동상 뒤에 전시됐다. 오픈식 당일에는 철로 만들어진 동상을 사람들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박정희 동상 주위로 철제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박정희 동상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철제 초소에서 무전기를 든 사람들이 수시로 나와 전시 구조물 주위를 감시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불상사를 대비해 경찰 인력도 배치됐다. 전시를 위해 섭외한 51명의 시각 작업자들 중 실명이 아닌 닉네임을 사용한 전시 참가자들은 모두 대구에서 활동하거나 대구시를 클라이언트로 두고 있는 디자이너들이었다. 2025년 4월 4일 헌재의 윤석열 탄핵 인용 다음날 전시를 오픈해서, 전시 마지막 날인 2025년 4월 10일에는 동상을 건립한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대구시장 사퇴 선언이 있었다. 《암흑의 날로부터》와 《빛나는 민주주의의 사물들》은 단언컨대, 가장 뜨거운 시기에 가장 뜨거운 장소에서 가장 뜨거운 마음으로 치러진 전시였다.








《암흑의 날로부터》, 《빛나는 민주주의의 사물들》
일시: 2025.4.5.-4.10.
장소: 동대구역 광장
➀ 《암흑의 날로부터》는 한상훈이 대표직을 맡고 있는 문화 기획 단체 ‘FLAT_PLACE’와 오랫동안 대구에서 활동했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스튜디오 ‘유연한’의 대표인 현준혁이 진행을 맡고,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구김종이’가 책임 연출을 맡았다. 영남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의 정재완 교수가 자문 역할을 했다.
➁ 《빛나는 민주주의의 사물들》은 ‘FLAT_PLACE’와 함께 황현호(마음공간 이소), 손영복(니나노예술가프로젝트협동조합), 김미련(로컬포스트) 등 대구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와 예술가 단체가 협업해 진행을 맡았다. 조형예술가 최수환이 자문 역할을 하고, 예술가 김병호가 책임 연출을 맡았다.
➂ 높은 곳에서 공사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 건설 현장에서 건설 중인 건물을 둘러싼 파이프 정글짐처럼 생긴 것.
《암흑의 날로부터》 인스타그램 바로 가기
글. 구민호 2025.7.1.